CAU FINE ART
서양화전공
강민서_Kang min seo
내 눈에 세계는 어떻게 보이는가? 거기에는 무엇이 있고 누가 사는가?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 역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흘러가는가?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 사전에, 어떤 단어가 있고 어떤 단어가 없는가?
과거에,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어떠한지'를 일상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내어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특별한 언어라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소통은 내면이나 시야에 보이는 것을 정의 내려보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고, 시간은 흘러 지금이 되었다. 이번 작품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한다.
내게 있어 세상은 내가 사는 곳이면서도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다. 어디든 내 자리가 없는 것 같고, 나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흘러가는 바람보다 미미한 존재이거나 나를 해치려고 하는 먹이사슬 상위의 포식자로 보인다.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할 피부 밑 내면의 세계도 시도 때도 없이 과잉 흥분과 절망에게 컨트롤 타워를 빼앗기고, 그 때에 정신은 일상과 비일상, 삶도 죽음도 아닌 어느 경계에 버림받는다. 기질적인 우울증, 동반된 이인증과 무기력증 탓에 나의 일상은 멀리 동떨어져 있고, 단절되어 있고, 희미하고 평면적인 시야 속에서 이어진다. 내면의 백과사전에는 온통 내가 정의 내린 공포와 부정적인 감정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는 두 캔버스에 보색에 가까운 색채와 서로 다른 성질의 두 가지 선을 사용하여 감각상의 시야를 담고, 가운데에는 육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배치하여 원래는 일체 되어야 하는 것들이 분리되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인증의 감각을 표현하였다. 캔버스 화면에서 붓과 팔레트 나이프를 이용하여 빠르고 신경질적으로 선을 그은 뒤 옆면을 날카롭게 교정한 붉은 선들은 정신없이 삶과 소통이 쏟아지는 사회의 시간으로, 손가락으로 물감을 투박하게 발라 일렁이는 초록색 선은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무의식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모든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껍질만 남은 육신은 손과 발이, 몸통과 뼈와 내장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서는 어느 쪽에 호응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리고 갈팡질팡한다. 모서리에서 얼굴을 내민 어떤 이질적이고 실재하지 않는 존재는 이 상황을 멋대로 컨트롤하고 있다. 제목인 ‘경계, 어느 쪽이 추방당했는가?’는 이 모든 와중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만 같은 감각 탓에 판단을 미루며, 타인이 된 것만 같은 자신을 관조하기만 하는 ‘생각’을 가리킨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답을 낸 스스로가 한심하다. 가볍게 시작한 기초적이고 친숙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볼품없고 무게만 잡는 것 같아 창피하고, 삶의 당연한 명제가 될 정도로 신경증을 극복하기 힘든 현실에 절망도 느낀다. 심지어 이런 심정을 작품으로 남겨도 될지, 커다랗고 쓸모 없는 자의식의 생떼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도 불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무능함으로 남고 싶지는 않기에 그림을 그린다. 통념적인 척도에서 보통에 미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동안 무엇을 겪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다. 미술은 내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에 더해 공감과 위로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준다.
이인성 장애는 보통 우울증 같은 기분 장애나, 불안 장애, 트라우마가 있는 환자들이 장기간 반복적으로 겪는 해리 장애 중 하나이나, 증상 자체는 신경증이 없는 사람도 특정한 상황에서 극심한 위협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자기방어 기전으로서 겪을 수 있다. 나와 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혹은 단발적으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위로와 힘을 얻기를 희망한다.
<바로크(자아)>, 2023, 캔버스에 유화, 112.1×162.2 cm
<바로크(객관)>, 2023, 캔버스에 유화와 복합재료, 112.1×162.2 cm